서남규
언제인가 이삿짐 속에서 노끈으로 꽁꽁 묶어 놓은 낡고, 누렇게 바랜 두꺼운 종이상자가 눈에 띄었다. 무엇이 많이 들어있었는지 등이 불룩한 이 상자를 무심히 어느곳엔가 묻어둔채 한참의 세월을 잊고 살았던 어느날, 색바랜 옛날 사진들로 꽉차있는 상자를 열어보았다. 그것은 나의 부친이 돌아가신 후의 일 이었다. 처음으로 본 이 낡은 사진들은 아버지 자신만의 기억과 추억의 창고 이었던 것을 알게 되었다.
나의 아버지, 서병안, 1918년 경북 안동에서 치과 원장의 장남으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와 6.25동란이라는 격변기의 삶 속에서도 자신만의 세상속에서 멀리 벗어나지 않은채, 세상보다는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 남달랐던 감성과 자신을 드러내기 싫어했던 성품으로, 어쩌면 사진에 빠지게 된 것은 필연이 아니었나 싶다. 생전에 자신을 보여주지도, 말하지도 않고, 사진으로만 자신을 묻어버린 나의 아버지, 조용히 그가 갔었던 과거의 길을 걸어 가본다.
굳이 작품으로 찍은것이라고 말하기보다는, 그저 사진이 좋아서, 일상속의 주변 사람들, 지나치다 마주친 풍경, 그리고 사랑했던 사람들의 얼굴들이 대부분이다. 50년대에 대구사우회 회원으로 활동했을 당시의 사진들 속에서도, 그 당시 흔히 보였던 사회적풍경은 보이지않고, 그저 자신의 주변과 일상에대한 우정과 연민의 연속이었다. 이들은 공개할 수 없었던, 사적으로만 간직하고 싶었던, 바로 아버지 의 일기이었던 것이다.
아버지의 기억속에서만 존재했던 말이없는 이 사진들이 이제 나의 기억속에 머무르면서, 또다른 묘한 트라우마가 나의 마음속에 자리잡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겹겹이 쌓이는 세월의 무게가 기억을 짓누르면서, 한 인간의 인생이 과연 순수하게 자신만의 것인지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된다
참조 . 본 전시의 사진들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라이카와 롤라이플렉스로 촬영되었음.
일부 원본 사진들은 당시의 젤라틴 실버프린트로 인화되었으며, 그 외 사진들은 당시에 현상했던 필름으로 재인화 되었음